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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궁금해요

제주 감귤의 역사와 금물과원 이야기

by 오늘도 소풍 2022. 11. 21.

 

제주 감귤이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부터 재배되었다는 것과 '감귤'이란 용어가 약 500년 전부터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조선시대에는총 37개소의 국영 감귤농장이 제주에 있었다니 감귤이 제주 특산물인 것은 오래 전부터였네요.


 

감귤박람회에서 전시된 감귤나무와 새 품종들
2022 감귤박람회 동안 전시한 감귤나무 종류와 새로 개발된 품종 들

서귀포농업기술센터에서 열린 2022년 제주감귤박람회(11.10~11.14)에 다녀왔습니다. 전시된 감귤나무와 감귤 종류도 많은데 새로 품종 개발한 것도 10여종은 되어 감귤 종류가 이렇게나 많은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감귤 종류는 극조생과 조생귤, 만감류는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 카라향 이 정도인데 전시된 감귤은 수십 종이고 새로 개발되는 감귤도 많았습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먹는 감귤이 조선시대에 먹던 그 감귤은 당연히 아니겠고, 그럼 제주 감귤이 언제부터 재배됐는지, 예전의 감귤에는 어떤 종류가 있었는지 등이 궁금했습니다. 당시 궁금했던 것을 가져온 팸플릿과 감귤박람회 홈페이지를 통해 알아보다가 한번 보고는 잊어버리니 기록으로 남겨 두면 두고두고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래 내용들은 대부분 제주감귤박람회의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힙니다.

 

감귤의 유래

「고려사」에 의하면 백제 문주왕 2년(서기 476년) "탐라에서 방물을 헌납하였다"  고려 문종 6년 (1052년) "탐라에서 제공하는 귤자의 수량을 일백포로 개정 결정한다"라고 되어 있어 고려시대에 감귤이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탐라지」(1653년) 과원총설에 제주 3읍의 관 주도의 과원 36개소, 12종, 3600주라고 기록되고 있어 감귤이 활발하게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납을 맞추기 위한 지방관리들의 횡포가 극에 달해 조선 말기에는 차츰 재배가 감소되었으며 고종 31년 (1893년) 진상 제도가 없어진 이후는 과수원이 황폐화되어 갔다.

 

 감귤(柑橘)이란 용어는 세조원년(1456년) 「세조실록 2권」 "감귤은 종묘에 제사 지내고 빈객을 접대함으로써 그 쓰임이 매우 중요하다"라고 기록한 것이 처음으로 나온다.

 

금물과원 이야기

제주를 대표하는 과일인 감귤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왕실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거나 왕이 신하들에게 특별히 내리는 하사품 중 하나였고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나오는 과일이었다. 나라에서는 이러한 귀한 감귤을 원활하게 공급받기 위해 제주도 여러 곳에 국영 과원을 조성하여 일반 백성들의 출입을 금하였다.

그래서 출입을 금하는 과수원이란 뜻으로 금물과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본격적으로 제주 과원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526년(중종 21) 제주 목사가 감귤을 진상하기 위해 5방호소(서귀, 별방, 수산, 동해, 명월)에 과원을 설치하고 감귤을 옮겨 심은 뒤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한 것에서 비롯된다.

 

17세기 중반에 쓰인 이원진의 「탐라지」에는제주 3읍의 과원에는 총 12종의 감귤이 식재되었다고 하고, 김정의 「제주풍토기」(1521)에는 금귤이 9월에 가장 먼저 익고 유감과 동정귤은 10월 그믐 때 익는다고 하였다. 

「탐라순력도」에는 감귤 봉진이라 하여 망경루 앞뜰에서 귤을 상자에 넣어 봉하는 과정 등이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당시 봉진한 수량은 다음과 같다.

당금귤 678개, 감자 25,842개, 금귤 900개, 유감 2,644개, 동정귤 2,804개, 산귤 828개, 청귤 876개, 유자 1,460개, 당유자 4,010개, 치자 112근, 진피 48근, 청피 30근 등이다.

 

또한,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제주목 23개소, 정의현 8개소, 대정현 6개소 등 제주도에 총 37개소의 과원이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중앙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16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8세기에는 42개소에 달하고 19세기에는 54개소에 이른다. 

이렇게 증가 추세를 보이던 제주 과원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게 되는데 감귤 재배가 농사의 수입 증대에 있는 게 아니라 조정에 진상하거나 세공하는 데 있었기에 감귤나무를 비밀리에 고사시키거나 생산을 의도적으로 기피했기 때문이다.

 

제주 과원의 감귤이 얼마나 귀했는지 엿볼 수 있는 것은 '황감제'라는 과거시험이다. 황감제는 1641년에 처음 시작된 과거로 성균관과 사학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을 대상으로 매년 12월에 제주 목사가 감귤과 유자 등을 진상하면 기념으로 시험을 보아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단 1명을 뽑아 바로 관직을 주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서귀포농업기술센터의 금물과원 안내문과 굼물과원
서귀포농업기술센터 홍보관의 금물과원 안내문 (작성자 사진)

금물과원의 그중 하나가 정의현 서쪽 50리, 현재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일대('금물' 일대)의 금물과원 禁物果園으로 국가 관할의 제주과원  중 가장 먼저 설치되고 가장 오랫동안 운영되었다. 이곳은 지금 서귀포농업기술센터 농업생태원이 되어 감귤에 대한 매력을 홍보하는 공간이 되었다.

 

 

글 작성 후의 소감

감귤이 조선시대부터 재배됐을 거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려 시대부터라니 역사가 참 길다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됐고, 감귤이란 용어가 1456년에 처음 기록됐다니 근대 들어 생긴 이름이라 생각한 제가 한참 틀렸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제주에 금물과원이 많을 때는 54개소나 있었다니 감귤 농부들의 고초가 어땠을까 짐작해봅니다.  양민의 마당에 있는 귤나무의 귤꽃 수를 세어서 수확기에 세금처럼 걷어갔다니 오죽하면 제주민들이 귤나무에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부어 죽어가게 했을까요?

금물과원은 서귀포에 한 군데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수 십개소나 되는 많은 금물과원을 놔두고 왜 그리 혹독하게 공납으로, 세금으로 갈취했을까요? 귤 맛보려는 한양 관리들의 횡포가 심했나 봅니다.

더 자세하게 적지는 못했지만 이 포스팅 덕분에 제주 감귤의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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